들꽃을 통해 인생을 보다
미국의 자연은 아기자기함 보다는 웅장함의 맛이 있습니다. 웬만한 곳은 걸어서 다닐 수 없어 차로 둘러보아야만 하는 곳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차에서 내려 자연 속으로 조금만 걸어 들어가노라면 고국의 산하(山河)에서나 느꼈던 아기자기한 맛을 느낄 수 있습니다. 트레킹 주변에 핀 이름 모를 들꽃들을 보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위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은은함과 순수함의 깊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꽃가게에서 보는 화려한 꽃들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입니다. 그 꽃으로 인해 사람들이 기뻐하고 그로 인해 꽃의 존재가치는 더욱 높아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더 깊은 산속에 피어 있을 들꽃들의 가치는 무엇일까?’ 어떤 꽃은 인간이 한 번도 다가갈 수 없는 위치에서 피었다가 한 번도 보여 지지 않은 채 사라지고 맙니다. 인간이 알아주지도 않고 보아 주지 않는 생애를 살다가 사라지는 들꽃이 얼마나 많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일까? 인간에게 보이지 않고, 기쁨을 주어 본 적 없이 피었다가 사라지는 수많은 들꽃들은 인간세계에 어떤 기여도 하지 않는 불쌍한 존재들일까? 아닐 것입니다. 복음성가 중에 “오늘 피었다 지는 들풀도 입히는 하나님”이란 가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어느 것 하나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지 인간 중심의 생각이고, 성과 주의적 사고방식에서 나온 편협함에서 오는 착각입니다. 타인(他人)에게 눈에 띄는 어떤 기여를 하지 않아도 생명 그 자체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이미 특별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 가치는 그를 창조한 절대자와의 관계 속에서 발견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명한 사람이 되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명예와 부(富)를 동시에 가진 사람들은 사실 전체 인구 중에 극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지구의 한쪽 구석에서 살다가 갑니다. 깊은 산속에서 피어 그 자리에서 일생을 보낸 들꽃처럼,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 삶, 혼자만의 삶을 살다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은 불쌍한 삶일까요? 그 자신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다 여기며 실패의식에 갇혀 살까요?
존재가 있고 목적이 있습니다. 존재가치가 목적가치보다 우선합니다. 아니 존재가치 속에 이미 목적가치가 들어 있습니다. 소유, 경쟁, 성취의 삶에 중독되어 있는 우리네 오염된 영혼을 정화시키기 위해, 오늘은 이름 없는 들꽃을 찾아 관상해 보면 어떨까 합니다. 아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은 산속 어딘 가에도 화초의 꽃보다 더 향기롭고 아름다운 들꽃의 존재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장목사
‘모든 장애우들이 복음을 듣고 행복하게 사는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