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보는 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려 할 뿐 아니라 그 밑바탕에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상대방의 약점이나 실수를 가차 없이 지적하고 드러냄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또한 자존감이 낮거나 내면에 분노가 많은 사람일수록 상대의 실수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합니다. 자신의 열등함을 보상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린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끌려 나왔습니다. 문제는, 간음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있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은 여인만 끌고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허리를 굽혀 땅에 글을 쓰셨습니다. 궁금합니다만, "년은 여기 있는데 놈은 어디 있느냐?" 라고 쓰시지 않았을까...?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혔다면 분명 남자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군중은 여인만 끌고 왔습니다. 남자는 놔주고... 심판하겠다는 사람들이 시작부터 의롭지 못했던 거지요. 그리고도 자신들은 대단히 의로운 척 양손에 돌을 들고 외칩니다. 돌로 칠까요? 용서할까요?
사실 둘러선 군중들에게는 처음부터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들 자신을 보게 해 주었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거라" 비로소 자신들을 보게 된 사람들... 하나씩 둘씩 물러갔습니다. 우리는 사람들 속에 숨어있는 열등감, 낮은 자존감이 불러온 비극의 장면을 봅니다.
간음은 백주 대낮에 저자 거리에서 하지 않고, 몰래 하는 것입니다. 이 범죄 현장을 몇 사람들이나 보았을까? 돌을 들고 있는 군중들 태반이 현장을 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자신들이 마치 본 것처럼, 아주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이런 여인은 돌로 쳐서 죽여야 한다며 돌들을 들고 있는 거지요. 가련한 사람들, 땅에 엎드려 울고 있는 여인보다 더 가련한 사람들, 타인의 허물을 정의에 이름으로 심판한다면서 자신의 죄 됨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 그래서 사랑의 반대 의미는‘자기 의’라고 하겠습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 죄를 짓지 말라”이 말씀이 내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열등감과 낮은 자존감을 돌아보게 하는 오후 녘입니다.
자기 자신은 보지 못하고, 늘 자기 의를 내세우며 절름발이처럼 살아온 나. 그래서 남의 허물과 잘못만을 탓하며 살아온 지난날을 생각하며 많이 아파했습니다. 실은 저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과 상대방을 동시에 보지 못한 채 죽기 살기로 타인의 잘못만 바라보는 것으로 인해 왜곡되고 편견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편견 때문에 부부도 교회도, 나라도 망가져 가는 줄 모른 채 말입니다. 주님처럼 양쪽을 볼 수 있는, 통합된 시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온전인데...“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장목사
‘모든 장애우들이 복음을 듣고 행복하게 사는 그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