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무사히?
“집콕” 생활을 한 지 벌써 넉 달이 지나기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불편하더니 어느새 적응이 되어 지금은 그런대로 지낼 만해 졌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에는 이제라도 곧 마음놓고 세상을 휘저으며 다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옛날 한국에서 시내 혹은 시외버스를 타면 영낙없이 운전기사 눈앞에 어린 소녀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머리가 길어서 그렇지 소녀가 아니라 소년입니다. 주일학교를 다닌 탓에 그 사진의 주인공이 소년 사무엘이라는 것을 누가 일러주지 않아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 위쪽에 ‘오늘도 무사히’ 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요즘 그런 기도가 매일 사람들의 입술에서 저절로 흘러나오곤 합니다. 저는 6.25 사변이 끝나던 해에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참혹하고 비참한 일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 당시는 세상에 태어난다고 저절로 생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생명 보전과 의식주 해결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이웃에 살던 사람이라도 며칠간 보이지 않으면 이미 고인이 된 일들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코로나 사태는 그 당시의 전염병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는 실감이 듭니다.
대학생 시절, 신문 기사 쓰는 교육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개가 사람을 물었다면 그것도 신문 기사감이 될 수 있지만,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것이 더 큰 보도 가치가 있다.’ 는 뉴스 밸류(news value), 곧 보도 가치에 관한 원칙입니다.
이제쯤에는 코로나19가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허용하신 것으로 생각이 점차 굳어져 갑니다. 절대주권자 하나님께서 허용하시지 않는다면 지금과 같은 글로벌 역병이 이처럼 난폭하게 지구를 휘젓고 다니며 생명들을 무참하게 죽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잔인하게 처형당하심을 허용하셨던 것처럼……. 하지만 예수님은 그토록 잔인한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여기에 분명해진 한 가지가 있는데, 곧 코로나바이러스의 난세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만약 예수님이시라면 지금과 같은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셨을까? 그렇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지낸 것에 대한 안도감도 감사한 일이지만, 이런 가운데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묻고, 그에 맞게 살아가려 발버둥치는 자세야말로 지금과 같이 답답한 현실 가운데서 승리하는 일일 것입니다.
장목사
‘모든 장애우들이 복음을 듣고 행복하게 사는 그 날까지...’